뉴에이지에 관한 진실 혹은 거짓 (하덕규 목사)
뉴에이지에 관한 진실 혹은 거짓 (하덕규 목사)
연주자 이루마는 뉴에이지 피아니스트로 잘 알려져 있다. 그는 깨끗하고 수려한 외모에 분위기 있는 피아노 연주 활동으로 특히 여성들에게 인기가 높다. 어린 나이부터 영국에서 클래식 피아노를 공부하고 돌아와 젊은 연주자로서 성공을 거둔 그는 클래식에 바탕을 둔 조용하고 아름다운 피아노 음악을 들려준다.
음반을 출시한 레코드사의 마케팅 방식에 따라 ‘새로운 뉴에이지 음악가’로 소개되기도 했던 이루마는 단순한 선율과 서정적인 느낌의 음악 스타일을 갖고 있다. 그의 음반은 매장의 뉴에이지 진열대에서 언제나 볼 수 있다. 그런데 얼마 전에 이루마와 통화를 하면서 그가 자신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부정적인 반응으로 인해 피해 의식을 갖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독실한 크리스천인 이루마는 자신의 음악 스타일을 뉴에이지 음악이 아닌 ‘세미 클래식’으로 분류하고 있었다.
차분한 음악을 하는 솔로 연주가들은 시장의 분류 방식에 따라 뉴에이지 음악가로 치부되기 쉽다. 따라서 반 뉴에이지 기류가 흐르고 있는 한국 교계로부터 오해 아닌 오해를 받게 되는 것이다. 그들의 연주가 음반 회사의 홍보 문구나 시장의 분류 방식에 따라 뉴에이지 음악이라고 불리게 되는 것도 문제이지만, 뉴에이지라고 명명되는 많은 음악들이 사탄의 음모에 연관된 것으로 인식하는 것도 큰 문제이다. 이것은 오직 ‘한국에서만 일어나는 사건’이다.
뉴에이지는 대중 음악 장르이다
뉴에이지 음악은 물고기자리로 상징되는 기독교의 시대가 가고 물병자리의 새 시대가 도래한다는 뉴에이지 운동의 출발과 함께 시작되었다. 힌두교 사상에 뿌리를 두고 있는 명상 음악 등이 1980년대 초반에 출현해 인기를 얻게 되자 그때부터 부드럽고 서정적이며 자연 친화적인 연주 음악들이 시장의 분류에 따라 뉴에이지에 포함되었다.
1980년대 뉴에이지 음악은 잃어버린 자연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며 신비롭고 자연주의적이며 때로 영적 분위기를 자아내는 음악으로 인기를 끌게 되었다. 그 후 뉴에이지 음악은 출발 당시의 정신과 관계없이 팝계에서 하나의 장르로 통하게 되었다. ‘엘리베이터 음악, 이지 리스닝’이라면서 제대로 대접도 받지 못하던 뉴에이지 음악이 클래식, 록, 재즈 등과 같은 음악처럼 대중 음악의 장르로 자리잡은 것이다.
뉴에이지 음악은 자연을 연상시키는 환경적 연주로서 사람들에게 평화로운 일상의 배경 음악을 선물했다고 할 수 있는데, 이런 음악을 제작하는 대표적인 음반사는 ‘윈 댐 힐’, ‘나라다’ 등이 있다. 1980년대 우리나라에 알려진 뉴 어쿠스틱 계열의 피아니스트 조지 윈스턴의 서정적 피아노 연주 음반 는 당시 국내에도 많은 뉴에이지 애호가들을 만들어 내면서 이 장르가 세계 속에서 대중화되는 데 크게 기여했다.
뉴에이지의 사상적 위험성
뉴에이지에 대한 비판이 가장 활발했던 1990년대 초, 문화 선교 단체들은 뉴에이지 음악의 근저에 범신론적 사상이 깔려 있다는 전제 아래 논의를 시작했다. 그들이 조사한 바대로 뉴에이지 음악 장르에는 우리가 경계해야 할 허무주의 세계관이 스며 있거나 접신, 주술, 범신론적 내용을 담은 음악들이 존재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반 뉴에이지 운동이 일어나던 당시에 이미 전 세계적으로 뉴에이지 스타일이 팝 음악 속에 자리를 잡았고 명상류의 뉴에이지 외에도 재즈, 세미 클래식, 크로스오버적 연주 음악 등이 뉴에이지로 분류되고 있었다. 즉 뉴에이지를 하나의 음악 장르로 받아들이는 흐름이 형성된 것이다. 반 뉴에이지 운동을 펼치고 있던 곽용화 목사는 이런 세계적 흐름을 인식하고 뉴에이지 분야 안에 존재하지만 뉴에이지 정신이 담기지 않은 ‘장르로서의 뉴에이지’를 거론하기도 했다. 그러나 뉴에이지를 향한 비판의 목소리 속에 곧 묻혀 버리고 말았다.
반 뉴에이지 운동 그룹은 팝 음악 속에 나타난 폭력성, 이교도적 요소 등을 비판하면서 대중 음악의 배후에 존재하는 사탄의 음모론을 제기함으로써 경각심을 북돋우고 기독교 교계를 향해 뉴에이지 음악에 대한 삼엄한 경계를 촉구하고 나섰다. 당시의 반 뉴에이지 그룹들로 인해 조성된 정보에 의하면, 뉴에이지 음악인들은 초월, 명상, 단전 호흡, 요가 등을 통해 우주의 어떤 영적 존재로부터 영감을 받는 자들이었다. 하지만 1990년대 당시 급작스럽게 형성된 반 뉴에이지 운동 그룹이 거론했던 국내·외 음악인들 중에는 그 사상과 무관한 뮤지션 개개인의 세계관을 표현하는 연주가들이 많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반 뉴에이지 운동은 그리스도인들이 음악을 감상하는 태도에도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 부드럽고 자연 친화적인 연주 활동과 함께 뉴에이지 장르 안에서 유통되는 모든 음악들이 한꺼번에 사상적으로 의심을 받게 되는 분위기가 형성된 것이다. 뉴에이지 사상과 무관한 대다수의 연주 활동 위주의 음악가들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단지 ‘시장의 분류법’에 따라 뉴에이지로 구분되었다는 사실은 무시된 채 말이다.
뉴에이지를 향한 마녀 사냥
현 시점에서 돌아볼 때 한국 교회를 강타했던 반 뉴에이지 운동은 무분별하게 유입되고 있는 대중 문화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고, 주위를 환기시키는 긍정적 효과를 담당했다. 그러나 당시 대중 문화 운동은 보다 균형 잡힌 신학적 고찰이 부족했다. 이원론적 구도에서 진행된 대중 문화 전체를 향한 무차별적 공격은 대 사회적 부작용을 파생시켜 기독교가 편협한 근본주의로 비춰지는 데 기여했다.
세계의 정신이 물고기자리에서 물병자리로 이동한다는 뉴에이지 철학이 서구 사회에 등장하면서 하나의 음악 장르로 형성되는 데 큰 영향을 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기독교인 청소년들은 당시 뉴에이지라는 음악이 있는 줄도 모르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반 뉴에이지 운동의 결과로 기독교인들은 뉴에이지 음악 전체를 사탄주의와 관계있는 특정 형식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뉴에이지 철학이 가진 이단성을 폭로하고 비판해 피해를 막으려다 뉴에이지 장르 전체를 부정적으로 바라보게 되면서 그 안에 있는 좋은 것들 즉 그 장르의 장점까지도 모두 함께 내던져 버린 것이다. 「새로운 대중 음악 CCM」의 저자 양동복의 표현대로 목욕물을 버리려다 아이까지 버린 결과가 돼 버린 것이다.
뉴에이지 장르의 구속 가능성
사실 뉴에이지 음악의 ‘스타일’만을 본다면 뉴에이지 음악은 현대인들에게 매우 좋은 장르이며 아름답고 소박하기까지 하다. 뉴에이지 음악은 우리를 묵상의 풍경으로 이끌어주는 스타일이다.
흥미로운 것은 현재 뉴에이지 음반 레이블 안에 적지 않은 크리스천 연주가들이 소속돼 있다는 점이다. 요즘 미국 기독교계에서 서정적인 목소리로 큰 인기를 얻고 있는 페르난도 오르테가는 대표적 뉴에이지 레이블인 ‘윈 댐 힐’에서 피아노 연주 음반을 내기도 했다. 또 기독교인 연주가 짐 브릭만이 ‘윈 댐 힐’에 소속돼 있고, 건반 연주자 겸 프로듀서인 리처드 사우더는 또 하나의 유명한 뉴에이지 음반사인 ‘나라다’에서 1990년대에 음반을 출시했다.
‘윈 댐 힐’, ‘나라다’ 등 뉴에이지 레코드 회사에는 각각의 세계관을 지닌 음악가들이 혼재하고 있다. 그 회사에 소속돼 있다고 해서 모두가 뉴에이지는 아니다. 오히려 크리스천 연주가들은 그 분야에서 뉴에이지의 흐름과 유통 구조를 적절히 활용하면서 크리스천 예술가로서 자신의 몫을 담당하기도 한다.
이제 뉴에이지 음악은 출발 당시의 목적과 관계없이 현대의 다른 대중 음악들과 같이 하나의 장르로 인식되고 있다. 그 장르의 일부가 반기독교적 내용을 다룬다고 해서 장르 전체를 비판하고 공격해야 한다면, 세상에서 믿지 않는 예술가들이 만든 기독교적이지 않은 예술들은 모두 이교도로 비판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복음을 위해 세상과의 접촉점으로 삼아야 하는 대중 예술 분야를 선과 악이라는 이원론적 구도로 바라본 결과이다. 대중 예술 자체를 일반 은총의 영역으로 바라보지 못하는 시각을 가진다면 현대인들과의 접촉점을 상실할 수밖에 없으며 ‘문화에 대한 기독교 게토 의식’만을 부추기게 된다. 록 음악 장르에서 볼 수 있듯이 예술은 어떤 세계관을 배경으로 하나의 문화 형식으로 출발하게 된다. 그러나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으며 음악은 그 형식 자체로 선하고 악한 것이 아님을 새롭게 인식해야 한다.
현대의 복잡 다양한 문화 속에서 오염된 세속 문화를 개혁하길 바라는 기독교인들에 의해 지금도 출발이 옳지 않았던 음악 형식들이 지속적으로 다스려지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음악으로 거듭나야 한다. 팝 음악 형식에서 출발한 ‘경배와 찬양’이 그 좋은 예이다.
묵상 음악의 재발견
고무적인 현상 중에 하나는 CCM계에서 이미 1980년대부터 뉴에이지 스타일과 유사한 연주 음악들이 만들어지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런 현상은 뉴에이지 음악이 대중화되기 시작하자, 크리스천 연주가들이 뉴에이지의 붐에 ‘자극’을 받아 묵상 음악을 만들면서 시작되었다.
사실 묵상 음악은 기독교 전통 안에 오래 전부터 있어 왔고 뉴에이지의 상업적 성공에 대한 자각으로써 기독교인 연주가들이 적극성을 갖고 대안적 작업을 시작하면서 주목받게 된 음악 형식이다.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뉴에이지 음악은 기독교에서 그 양식을 베껴간 것들이 많다. 현재 뉴에이지 안에서 찾아볼 수 있는 아일랜드 민속 음악 ‘켈틱’(Celtic)도 그 중에 하나이다. 가수 ‘엔야’의 음악을 비롯해 오래 전부터 각광을 받고 있는 켈틱은 옛날 아일랜드에 기독교가 전파되면서 더욱 발전하게 되었다(우리 찬송가에도 여러 곡이 수록돼 있음). 이 신비롭고 고풍스러운 스타일은 유럽을 뿌리로 하는 서구인들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며 다시 주목을 받고 있다(켈틱 찬송가가 리바이벌되는 붐을 일으키기도 했다).
요즘에 뉴에이지 음악은 환경, 명상, 태교, 치료 음악 등으로 널리 이용되고 있다. 그리고 이런 현상에 대한 기독교적 대안도 마련되고 있다. 미국을 비롯해 우리나라 기독교 레이블에서 내놓고 있는 묵상 음악, 치료 음악, 태교 음악, 환경 음악 등이 그것이다. 사실상 음악 치료의 본류는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다. 다윗이 악신 들린 사울을 치료하는 데 음악을 사용했으며 그 도구는 지금 뉴에이지에서 많이 사용되고 있는 하프였다. 다윗의 연주는 참으로 영감 있고 아름다우며 탁월했을 것이다.
지친 현대인들에게 쉼을 제공하는 뉴에이지 음악은 우리가 다스리고 정화시켜야 할 분야임에 틀림없다. 범신론에 근거한 자연주의 음악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을 인정하고 높이는 찬미의 음악, 만물에 신이 깃들어 있는 자연이 아니라 성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만드신 ‘피조된 자연’을 노래하는 음악이 필요한 것이다. 이런 것들은 현대 기독교 대중 음악인 CCM 안에서 눈에 띄게 나타나고 있다. 그것도 아주 탁월하고 깊이 있는 음악들로 말이다.
국내에서 활동하고 있는 뉴에이지 스타일의 크리스천 연주가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의 과정에 있다면, 그들의 음악은 대중 문화 안에서 오염된 음악들에 대한 훌륭한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참된 소망을 외치는 소리
반 뉴에이지 운동의 바람이 분 지 어느덧 15년을 넘기고 있다. 이제 한국의 CCM계는 자생적으로 대안을 만들어 내놓을 만큼 성장했다. 요즘 CCM의 침체 현상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지만 앞으로 현대 대중 문화 속에서 CCM 사역의 가능성은 매우 크다고 하겠다. CCM은 대중 문화의 병리적 현상을 향해 현대적 언어로 답을 내놓는 참된 소망을 외치는 소리이기 때문이다.
하 덕 규 소개 -
'시인과 촌장' 으로 대중 가수로 활동하다가 회심한 후 〈가스펠 아워〉와 〈하덕규의 CCM 캠프〉 라디오 방송 진행 등 찬양사역자로 20여 년을 섬겼다. 지금은 백석대학교 교수이며 찬양 사역자들을 양성하는 일에 힘쓰고 있다. 2010년에 목사안수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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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천과 뉴에이지 음악
(최혁 목사)
80년대 초에 독일에서 공부할 때 저는 페터라는 독일 학생과 한 방을 쓰면서 성경을 공부하고 있었습니다. 복음서를 공부하면서 꽤 은혜를 받는 것 같던 페터는 어느 날 성경을 더 이상 공부하지 않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알고 보니까 그는 그 당시 독일 학생들 가운데 독버섯처럼 퍼져나가던 뉴에이지 운동에 빠져들고 있었습니다. 페터는 내 앞에서 자기들이 행하고 있는 명상 훈련을 시범해 보였습니다. 마치 부처처럼 가부좌를 틀고 앉더니 명상을 도와준다는 음악을 틀었습니다. 그 음악은 우리에게 잘 알려진 헨델의 '라르고'라는 음악이었습니다. 또 그리그의 페르퀸트 조곡 중에 나오는 '아침'을 듣기도 했습니다. 이 곡들은 매우 조용하고 명상적이기 때문에 그 당시 뉴에이져들에게 인기곡 이었었던 모양입니다.
우리는 뉴에이지의 음악과 뉴에이지 풍의 음악을 구별할 수 있어야합니다. 뉴에이지의 음악은 특별한 목적을 위해 만들어진 음악입니다. 반 기독교적이요, 적 그리스도 적일 수 있습니다. 그런 가치관을 인정하고, 믿고 그 음악을 듣는다면 이것은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 그러나 뉴에이지 풍의 음악은 그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뉴에이지 풍의 음악이란 시끄러운 헤비메탈에 대한 반작용으로 나온 음악입니다. 그러므로 악기 사용이 소박하고, 소리가 부드럽고, 반복을 많이 사용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런 경향의 음악을 모두 뉴에이지 음악으로 몰아 부치는 것은 70년대에 북한이라고 말만 사용해도('북괴'라고 해야하는데) 빨갱이처럼 생각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만약 뉴에이지 풍의 음악은 사용해도 안되고 들어서도 안 된다고 주장한다면 교향곡, 협주곡, 소나타의 2악장은 모두 들어서는 안될 음악일지도 모릅니다. 2악장은 대게 느리고 명상적이기 때문입니다. 헨델의 '라르고'나 비발디의 '사계'는 뉴에이지 음악이 아닙니다. '사계'의 작곡자 비발디는 천주교 신부입니다. 그러나 뉴에이져가 자신의 목적으로 그런 음악들을 사용할 경우는 뉴에이지의 음악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반대로도 생각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뉴에이지의 음악을 하나님 찬양하는데 빼앗아 올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사실 교회 음악을 연구해 보면 구약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세상의 음악에 하나님 찬양의 가사를 부쳐 사용한 것이 많이 있습니다. 이렇게 사용하는 방법을 콘트라팍타 (Kontrafaktur)라고 합니다.
뉴에이지의 음악은 이제 대중음악의 한 장르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즐기고 있지만 대부분 종교적인 이유에서 그 음악을 듣고 있지는 않습니다. 마치 콜라를 좋아하던 사람들이 좀더 부드러운 스내플(Snapples)을 좋아하듯 시끄러운 롹 음악에 물린 사람들이 조용한 음악을 즐기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뉴에이지 음악은 음악의 한 종류일 뿐입니다.
나는 크리스천이 구태여 뉴에이지의 음악에 심취하기를 원치 않습니다. 그러나 모르고 들었다고 해서 그것이 큰 죄악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마치 사탄의 마수에 걸린 것인 양 너무 두려워하지는 마십시오. 중요한 건 내가 복음으로 철저히 무장되어 있는 사람이냐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세상 어떤 문화도 능가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복음으로 충만한 사람은 어떤 문화에 접하여도 자유로울 수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상에게 제사 드린 음식에 대하여 왈가왈부하던 고린도 교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무릇 시장에서 파는 것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 이는 땅과 거기 충만한 것이 주의 것임이니라." (고전10:24-25)
세상 모든 문화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사단 마귀에게 빼앗긴 모든 세상의 문화를 다시 하나님 찬양의 도구로 만드는 일에 당신이 일익을 담당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출처] 뉴에이지에 관한 진실 혹은 거짓 (주임재교회) |작성자 하늘지기 |